제목: 느리게 읽어도 괜찮아
글/그림: 허드슨 탤벗 옮김: 허진
출판사: 미운오리새끼
발행일: 2023.10.31.
서평: 박선희(한국방송통신대학교 명예교수)
글과 그림을 읽는 것은 다르다. 한 폭의 그림은 한 눈에 들어오는 공간적인 것인 반면 글은 쓰여진 방향에 따라 읽을 시간을 요한다. 아무리 속독법을 익혔다 하더라도 시간이 걸려야 글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인지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작가는 난독증과 유사한 증상으로 글을 느리게 읽는 ‘느린 아이’로 통했다고 한다. 글을 읽을 때에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속도보다 더 빨리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제대로 읽지 못해 생긴 부끄러움은 상처가 되었다. 그러나 그림 그리기와 이야기를 좋아한 그는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읽게 된다. 그러면서 글을 빨리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보다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천천히 시간을 들여 글을 읽게 되면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자서전적 그림책이다. 주인공은 마음속으로 낱말을 하나하나 그려봐야 하고, 학급에서 책을 가장 느리게 읽고, 친구들이 다음 페이지로 넘길 때 여전히 첫 번째 문장을 읽고 있는 자신의 비밀을 들킬까 봐 노심초사한다. 처음부터 책이 무섭지는 않았다. 그림은 크고, 글자는 얼마 없었는데, 차츰 그림은 작아지고 글자가 많아지면서 글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길을 잃고 만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수많은 단어들이 달려들 때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지만, 그림 그리기에 자신이 있는 아이는 글로 둘러싸인 세상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 그린다.
모르는 단어는 뛰어넘고, 아는 단어를 따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다 보니 어느새 책을 읽고 있다는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글을 읽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준 것이다.
‘빨리 읽을 필요가 있을까?’ 느리게 읽는 사람이 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셰익스피어,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피카소 등 훌륭한 사람들도 느리게 읽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힘을 얻는다. 드디어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부끄러움의 벽을 무너뜨리고 느리게 읽는 사람은 오히려 이야기를 더 즐기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방식을 찾아낸다.
검은 머리에 피부가 희끗희끗하고 마른 아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그림과 글을 함께 사용하기를 즐겼다. 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다양한 색깔을 찾는 것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책을 읽고 새로운 단어를 찾는다. 자신의 속도로 글을 읽기 시작하자 책이 점점 재미있어지고 글은 친구가 되어 이야기 만들기를 즐기게 된다.
허드슨 탤벗은 프레임 없이 공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글과 그림 간의 역동적이고 빈틈없는 상호작용을 구사한다. 자신의 안식처인 그림 속으로 다이빙 하는 행복한 모습, 수많은 책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자신을 잡으려고 쫓아오는 배열, 스케치북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모습, 글로 빼곡히 채워진 나무덩굴로부터 스케치북에 올라타 글의 바다에서 즐겁게 파도타기를 하는 모습 등은 독자의 공감을 불러내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잉크, 색연필, 수채물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글을 느리게 읽는 아이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극대화한다.
2022년 슈나이더 가족 도서상 명예상 수상작으로 느리게 읽는 독자들이 주인공의 아픔에 공감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극복하는 모습에서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