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키키의 산책
글/그림: 마리 미르겐/ 옮김: 나선희
출판사: 책빛
발행일: 2021.05.30.
서평: 박선희(한국방송통신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
텁수룩한 반려견, 키키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계속 오른쪽 방향을 바라보며 터벅터벅 걷는 쥘리앵은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돌아보지도 않는 사이 키키는 독수리에게 낚아채인다. 독수리는 호랑이를 만나자 놀란 듯 달아나고, 호랑이를 데리고 가는 쥘리앵, 새까만 배경화면의 주황색 눈동자와 흰색 눈동자는 페이지터너 역할을 한다. 주황색 눈동자의 박쥐가 여우를 만난 후 박쥐는 어디로 간 걸까? 비가 내리고 바다 속을 걸어가는 장면에서 육지에 엎드린 여우는 문어를 데리고 멀어져 가는 쥘리앵을 바라볼 뿐이다. 물 속으로 내려온 고릴라의 손이 또다시 육지로 독자를 안내한다. 거미, 파리에 이어 뱀을 데리고 가는 장면에서 드디어 키키가 나타난다.
마침내 키키를 데리고 가는 쥘리앵은 그동안 자기 뒤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갑자기 멈춰 돌아서서 오히려 키키에게 ‘산책 끝!’을 선언한다. 산책을 시작할 때 의기양양하게 꼿꼿하게 들었던 머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따라가는 모습이 왠지 주인을 원망하는 듯하다. 산책이 무엇인가?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찾지도 않고 혼자 앞만 보고 걷더니 주인 마음대로 끝내는 것이 포식자들간의 경쟁 못지 않게 반려견이라도 동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마지막 장면에 그동안 잡아먹히거나 달아난 줄 생각했던 포식자들이 한데 모여 산책을 마치는 키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 장면의 거터(gutter)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로 활용되고 있다. 전체 그림책에서 프레임 없는 그림은 독자에게 더 극적으로 다가오고, 포식자들이 한데 엉겨 붙어있는 모습에서 과연 모든 동물이 살아있는지, 어떤 동물이 없어졌나, 하나씩 살펴보면서 앞뒤로 책장을 넘기게 한다.
이 책은 로지의 산책(팻 허친스 그림·글)을 떠올리게 한다. 그 이야기에서는 산책을 나간 닭 로지에 대한 이야기를 글 텍스트로, 로지의 뒤를 밟으며 호시탐탐 잡아먹으려고 노리는 여우가 그림 텍스트의 주인공으로, 절묘하게 글과 그림이 독립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대위법적 상호작용 서사 전개를 한다. 그와 유사하게 ‘쥘리앵이 ~를 데리고 가요.’라는 글 텍스트는 쥘리앵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쥘리앵 뒤에서 일어나는 그림 텍스트는 포식자들간의 치열한 경쟁이 또 다른 서사를 전개하며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룬다.
콜라주 기법으로 유쾌하면서도 숙련된 다양한 기교의 화려한 그림은 누적적이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가미하여 환상적인 모험으로 초대한다. 어떤 동물이 다음에 오는지, 놀람이 재미를 주는 독특한 작품이다. 2020년 볼로냐 라가치상 오페라 프리마 부문 스페셜 맨션, 2019년 몽트뢰이 페피트상 일러스트 부문 최우수 그림책, 2019년 벨기에 국제 아동 도서 평의회 리비리트상을 수상한 책으로 어린이들과 흥미진진한 유추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특별한 환상 그림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