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상자 세상
글: 윤여림 / 그림: 이명하
출판사: 천개의 바람
발행일: 2020. 11. 01
서평: 김은심(강릉원주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
상자처럼 생긴 책의 표지를 지나 만나는 첫 면지에는 우울한 회색빛 고층 건물과 또 회색빛 자동차들 사이에 노란색 화물칸을 달고 달리는 번개 쇼핑 택배 화물차 한 대가 눈에 띕니다. 다음 장에는 건물도, 자동차도, 숲도, 가로등도, 길도 사라진 길에 택배 화물차만 바쁘게 달립니다. 그리고 책을 덮기 전 만나게 되는 마지막 면지에는 한 대였던 택배 화물차가 10대로 늘어나 있습니다. 별로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이 전개될 것 같은 이 책은 반복해서 읽다 보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우리를 찌릅니다.
번개 쇼핑 택배기사는 택배 상자를 놓자마자 바쁘게 떠나고, 잠시 후 열리는 아파트 문. 주변을 살피던 남자는 쓱 택배 상자를 들고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렇죠. 우리는 이제 서로 얼굴도 보지 않고 물건만 주고받습니다. 주고받기 위해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건네고 감사함을 담아 물건을 받는 그런 관계는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온라인으로 물건을 주문하고, 당일배송으로 문 앞에 도착해 있는 물건을 집어 들죠. 주문했던 헬멧 모양의 자동칫솔. 물건을 꺼내고 한번 사용해보고 상자는 던집니다. 휙! 툭! 슉! 뻥! 아파트 각 층, 각 호에서 버려진 택배 상자들은 쌓이고… 쌓이고… 쌓입니다. 높이 높이. 아파트보다 더 높이 쌓인 상자 더미.
윤여림 작가와 이명하 작가의 상상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꼬르르르륵.’ 물건이 빠져나와 텅 빈 상자들은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자기 주변에 있는 것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하는 거죠. 베란다도, 아파트도, 자동차도, 나무도, 그리고 사람도 모두 먹어 치웁니다. 우적우적, 와구와구, 아그작 아그작, 질겅질겅, 후루룩, 냠냠, 쩝쩝. 배부른 상자들은 이제 심심합니다. 놀이가 시작됩니다. 기억 놀이. 상자들은 각자 어떤 물건들을 싣고 다녔는지 자랑합니다. 나중에 꼭 살펴보세요. 없어도 되지만 재미있고 기발한 물건들이 많으니까요.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질 수많은 물건을 담았던 상자들은 옛날 나무였던 기억을 되살리네요. 뭉게뭉게 상자마다 나무들이 피어오르고, 급기야 모두 함께 나무를 만듭니다. 잇차 잇차. 모든 것을 먹어 치운 상자들이 스스로 나무를 만들어 이룬 숲. 그곳에 동물들이 찾아와서 쉽니다. 호랑이, 도마뱀, 기린, 새 그리고 푸른 하늘. 이곳에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상자들이 먹어 치웠으니까요. 그런데 두 작가는 이렇게 끝내긴 아쉬웠는지 조금 더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이 직접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인간은 미래를 예견하고 그 미래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지구를 파괴함으로써 그 자신도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며 레이첼 카슨은 60여 년 전인 1962년, 그녀의 역작인 ‘침묵의 봄’의 한 꼭지에 ‘내일을 위한 우화’를 썼습니다. 지구의 화학물질에 의한 오염이 아름답고 평화로웠던 한 마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이 우화는 ‘불길한 망령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찾아오며 상상만 하던 비극은 너무나도 쉽게 적나라한 현실이 된다.’라는 사실을 아주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간혹 이렇게 저렇게 생긴 상자의 테이프를 뜯고 해체하여 납작하게 만들어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가면, 물건만 빼고 채 정돈조차 되지 않은 상자들이 높이 쌓여있는 모습을 만나곤 합니다. 일주일동안 사용할 비닐봉지의 수를 줄여보고, 텀블러를 사용하고, 가급적 온라인으로 주문하지 않고 장바구니를 들고 동네 마켓에서 장을 보고, 꼼꼼히 재활용을 분류하지만, 여전히 집에서 쏟아지는 쓰레기의 양은 엄청납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는 무력감도 찾아듭니다. 앞표지부터 마지막 뒤표지까지 총 30여 장이 안 되는 ‘상자 세상’에서 들여다본 우리의 미래는 아인슈타인이나 카슨이 예견했던 미래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 분이라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상자나무만 남은 세상에 관해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상자나무 세상 뒤의 이야기도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저는 오늘도 그저 장바구니를 챙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