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파라파냐무냐무
글 /그림: 이지은
출판사: 사계절
출판일: 2020년 6월 10일
서평: 김세희(KBBY 전임회장)
이 그림책은 하얀 마시멜롱들과 검은 털숭숭이의 만남에서 시작된 낯선 이에 대한 편견 그리고 이해와 포용 과정을 다루고 있다. 평온한 마을에 천둥 같은 목소리로 “이파라파냐무냐무”라고 외치면서 덩치까지 위협적으로 큰 털숭숭이가 나타나자 마시멜롱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게다가 ‘냐무냐무’라는 소리는 ‘냠냠’ 소리를 연상시켜 마시멜롱들은 털숭숭이가 자신들을 잡아먹으러 왔다고 상상한다. 초콜릿 물 냄비 속 마시멜롱, 꼬치로 꿰어진 마시멜롱 등 마시멜롱들의 상상은 점입가경이다. 이 장면은 초코파이의 맛을 좌우하는 파이 속 하얗고 말랑한 마쉬멜로를 떠오르게 한다. 마시멜롱은 마쉬멜로에서 이름과 외모를 따온 듯하다. 이 매력적인 캐릭터는 말랑말랑하고 하얀 마쉬멜로에 작고 검은 고깔을 쓴 아주 작은 모습으로 꼬물꼬물 움직이며 줄을 지어 다양한 작업을 하기도 하고 인간처럼 다양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마시멜롱들은 살아남기위해 털숭숭이를 공격한다. 또한 잠든 사이에 마시멜롱들은 털숭숭이를 꽁꽁 묶기도 하는데, 털숭숭이는 소인국에 온 걸리버를 연상시킨다. 마지막 수단으로 불공격을 하기로 결정한 마시멜롱들 앞에 용감한 마시멜롱 친구 하나가 나와 “정말 털숭숭이가 우리를 냠냠 먹으려는 걸까요? 털숭숭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친구의 의견은 다수의 의견에 묻혀 버린다.
이 용감한 마시멜롱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홀로 털숭숭이를 만나러 간다. 때마침 시작된 마시멜롱들의 불공격속에서 털숭숭이 덕분에 살아남은 마시멜롱은 “이파라파냐무냐무”가 아니라 “이빨 아파 너무너무”라는 털숭숭이의 바른 발음의 말을 듣게 된다. 결국 마시멜롱들은 합심하여 털숭숭이의 충치를 고치느라 애쓴다. 털숭숭이는 충치를 고친 뒤 “아나파”라고 말하고, 마시멜롱들도 “아나파”를 따라 반복한다. 이후 털숭숭이와 마시멜롱들은 사이좋게 지낸다. 또 털숭숭이가 칫솔을 몸에 달고 다니며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웃는 것을 보면 앞으로는 이도 잘 닦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이 그림책은 그림이 거의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따라서 글은 적고 의성어와 의태어가 많아 아이들이 매우 좋아할 것 같다. 인물들의 움직임이 역동적이며 한 페이지를 만화의 컷처럼 다양하게 분할하여 사용하여 속도감을 느끼게 하며 독자의 이야기 이해를 돕는다. 마시멜롱이 생각하는 장면이나 상상 장면은 분할면의 테두리를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처리하여 사실과 구별하는 세심함도 돋보인다. 클로즈업한 장면들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큰 몫을 하는데, 클로즈업된 털숭숭이의 털, 무서운 눈, 뾰족한 손톱, 충치가 있는 털숭숭이의 입 안, 이가 아파서 울고 있는 털숭숭이 입안에 앉아있는 용감한 마시멜롱 친구의 장면 등이 인상적이다. 특히 용감한 마시멜롱이 털숭숭이를 처음 만나는 두 장면은 둘의 크기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음 장면에서 털숭숭이는 아래로 내려다보고 마시멜롱은 목을 뒤로 젖혀 올려다보는데 독자로 하여금 수직 판형처럼 그림책을 돌려 보게 만든다.
이빨은 ‘이’를 낮잡아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이다. “이파라파냐무냐무”는 유아들에게 ‘이빨’이라는 단어보다는 ‘이’라는 단어를 먼저 배우게 해야 한다는 교육적 사고에 갇힌 우리를 다소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이 그림책에서는 분명 “이아파냐무냐무” 보다는 “이파라파냐무냐무”가 보다 극적인 효과를 준다. 게다가 “아나파”등 유아들이 발음나는대로 단어를 쓰기 시작하는 ‘창안적 글쓰기(invented spelling)’ 발달단계를 존중하는 측면도 있어 미소를 머금게 한다.
나아가 주류사회에서 낯선 이를 거부하는 원인 중 하나는 ‘낯선 이에 대한 정보 불충분’을 들 수 있다. 이 그림책에서도 마시멜롱들은 털숭숭이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외모에 대한 편견으로 색안경을 끼고 털숭숭이를 적으로 오해하였다. 따라서 이 그림책은 영유아들의 다문화교육에도 의미 있게 사용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털숭숭이는 단지 충치로 인한 아픔을 호소한 것이었고, 털숭숭이의 요구는 마시멜롱들에게서 이를 치료하는 도움을 받음으로써 해소되었다. 편견을 요구충족으로 바꿀 수 있을 때 비로소 다문화 구성원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